요즘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예전보다 감정이 없는 것 같아.”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상태가 많아졌어.”
“무덤덤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냥 반응이 없어.”
이 말은 흔히 이렇게 해석된다.
번아웃, 우울, 스트레스, 혹은 나이가 들어서 생긴 무뎌짐.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감정이 실제로 사라졌다면
우리는 불편함도, 공허함도 느끼지 못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왜 이렇게 허전하지?”
“뭔가 계속 빠진 느낌이야.”
이건 감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감정이 ‘차단된 채 유지되는 상태’에 가깝다.

1. 뇌는 감정을 없애지 않는다. 먼저 ‘반응’을 줄인다.
뇌의 기본 전략은 단순하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 비용이 가장 적은 쪽을 선택한다.
감정이 너무 잦고,
감정에 반응할수록 피로가 누적되는 환경에서는
뇌는 감정을 제거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조정한다.
- 감정 신호는 유지하되
- 행동 반응을 최소화한다
즉,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껴도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나타난다.
- 슬픈 일을 겪어도 울지 않고
- 기쁜 일을 겪어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 분명 불편한데 “괜찮아”라고 말한다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감정-행동 연결 회로가 느슨해진 상태다.
2. 반복된 감정 소모는 ‘차단’을 학습시킨다.
요즘의 감정 환경은 이렇다.
-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 자극을 받고
- 반응해야 할 상황은 많고
- 정리할 시간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에서
모든 감정에 성실하게 반응하는 건
에너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뇌는 학습한다.
“이 감정에 반응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학습이 반복되면
뇌는 감정을 없애지 않고
출력 단계를 줄인다.
그 결과 나타나는 감각이 바로 이것이다.
- 감정은 있는데, 표현이 안 되는 느낌
- 속에서는 움직이는데, 겉은 고요한 상태
- 반응하지 않는 내가 더 편해 보이는 순간들
이건 냉정함이 아니다.
과부하에 적응한 결과다.

3. ‘무덤덤함’은 성숙이 아니라, 보호 전략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반응 상태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제 성숙해진 거겠지.”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아서 좋아.”
물론 일부는 맞다.
하지만 문제는 기준이 사라졌을 때다.
- 기쁜 일에도 반응이 없고
- 불편한 일에도 문제 제기가 없고
-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흐려진다
이 상태는 성숙이 아니라
감정 구분 능력이 둔화된 상태다.
뇌는 감정을 다루기 힘들어질수록
‘강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보호한다.
그 결과,
삶의 자극 전체가 평평해진다.
편해 보이지만,
동시에 공허해진다.
4. 감정이 막힌 게 아니라, ‘표현 실패’가 누적된 상태다.
중요한 지점이 있다.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 무덤덤해지는 게 아니다.
느낀 감정이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차단된다.
- 말하려다 삼킨 감정
- 문제 삼으려다 넘긴 불편함
- 반응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순간들
이게 반복되면
뇌는 이렇게 정리한다.
“표현은 비용이 크고, 보상은 적다.”
그 순간부터
감정은 내부에서만 맴돌고
외부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감정이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정확히는
감정이 갇혀 있는 상태다.
5. 다시 반응하기 시작하면, 감정은 돌아온다.
감정을 되찾기 위해
억지로 더 느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단 하나다.
작은 반응을 허용하는 것.
- 불편하면 “불편하다”라고 말해보기
- 좋으면 “이건 좋다”라고 인정하기
- 애매하면 “지금은 모르겠다”라고 정리하기
이건 감정을 키우는 행동이 아니라
감정-행동 회로를 다시 연결하는 작업이다.
뇌는 이렇게 학습한다.
“이 감정에 반응해도 괜찮다.”
“출력해도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무덤덤함은 조금씩 풀린다.

결 론 -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반응을 멈춘 것이다.
우리가 요즘 느끼는 감정 둔화는
감정 결핍의 문제가 아니다.
- 감정은 계속 생성되고 있고
- 다만 반응이 억제된 상태다
이걸 이해하면
자기 비난이 줄어든다.
“내가 차가워진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참고 있었구나.”
감정은
억지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다시 반응해도 안전하다고 느낄 때 돌아온다.
그리고 그 반응은
아주 작아도 충분하다.
그게 바로
무감각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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