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보다 삶은 분명 편해졌다.
버튼 하나면 난방이 켜지고,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음식이 도착하며,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일정과 연락은 자동으로 관리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몸은 덜 쓰는 것 같은데,
피로는 오히려 더 자주 찾아온다.
“요즘 왜 이렇게 쉽게 지치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에너지가 없는 느낌이야.”
이 현상은 체력 저하나 의지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뇌가 환경을 계산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착시다.

1. 편해진 환경은 ‘에너지 소모가 없을 것’이라는 신호를 준다.
자동화된 환경은 뇌에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
“이건 별로 힘 안 들 거야.”
“금방 끝날 일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뇌는 낮은 비용을 예상한 상태에서
막상 생각·결정·전환이 계속 발생하면
에너지 사용에 큰 오차가 생긴다.
그 결과,
실제로는 꽤 많은 인지 에너지를 썼는데도
뇌는 그만큼을 쓴 줄 모르고
뒤늦게 한꺼번에 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2. 자동화는 ‘행동’을 줄였지, ‘결정’을 줄이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다 자동이라서 편하잖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선택지는 더 많아졌고
알림은 끊임없이 끼어들며
집중은 자주 끊기고
전환 비용은 계속 누적된다.
자동화는 물리적 행동을 줄였을 뿐,
뇌의 미세한 판단과 전환은 오히려 늘렸다.
이런 미세 소모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뇌 스스로도
“나는 별로 안 썼다”라고 착각하게 된다.
3. 그래서 피로는 ‘과정 중’이 아니라 ‘끝난 뒤’에 온다.
예전의 피로는 비교적 명확했다.
힘든 일을 하면 바로 지쳤다.
지금의 피로는 다르다.
하루가 끝나갈 때 갑자기 몰려오고,
쉬고 있는데도 회복이 잘되지 않으며,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건 에너지 부족이 아니라
에너지 사용 인식 실패에 가깝다.
뇌는 자신이 얼마나 썼는지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고,
그 오차가 늦은 피로로 드러나는 것이다.

4. ‘편한 환경’일수록 회복은 더 의도적으로 필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더 열심히 하거나,
무작정 더 쉬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필요한 건
뇌가 에너지를 썼다고 인식할 수 있는 신호다.
예를 들면,
일의 끝을 명확히 표시하는 작은 마무리,
무의미한 전환을 줄이는 환경 정리,
생각을 잠깐이라도 정리해 두는 기록,
짧아도 ‘완료감’이 남는 행동들이다.
이런 장치는 실제 에너지 회복보다 먼저,
에너지가 회복될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 준다.

결 론 - 우리는 편해진 게 아니라, 계산이 복잡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의 피로는
약해져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환경은 더 부드러워졌지만,
뇌가 처리해야 할 신호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편해진 환경에서조차
계속 지친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피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왜 이렇게 못 버티지?”가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에너지를
뇌가 아직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구나.”
그 인식 하나만으로도
피로는 이미 절반쯤 정리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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