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줄어들었다.
밤에 이유 없이 심장이 뛰는 일도 줄었고,
괜히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는 횟수도 적어졌다.
분명 좋아진 상태다.
그런데 또 이상하다.
불안이 사라졌는데,
마음이 편해진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묘하게 비어 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가만히 있으면 허전하고,
괜히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감각은 종종 이렇게 표현된다.
“이제 괜찮아졌는데…
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
1. 불안이 사라지면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불안을
없애야 할 감정이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불안이 줄어들면
곧바로 이런 상태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정감,
여유,
편안함.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는
곧바로 평온이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공백이 남는다.
왜냐하면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한동안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온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2. 불안은 방향을 만들어주던 감정이었다.
불안할 때 우리는 움직인다.
확인하고,
준비하고,
계속 생각한다.
불안은 힘들었지만
분명한 역할이 있었다.
“지금 뭔가 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 메시지 덕분에
삶에는 방향이 생겼고,
행동에는 이유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불안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이 있다.
바로
움직여야 할 이유다.

3. 공백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다시 자신을 의심한다.
“의욕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이러다 다시 무너지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멍하지?”
하지만 이 공백은
퇴보가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과정이다.
뇌는 오랫동안
불안을 기준으로 움직여 왔다.
그 기준이 사라지면
잠시 멈춰 서서
새로운 기준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백은
망가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재정렬 중이라는 신호다.
4. 이 시기에 억지로 채우려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바빠지려 하고,
괜히 목표를 만들고,
불필요한 걱정을 끌어온다.
“그래도 불안한 게 나은 것 같아.”
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이건
회복이 아니라,
이전 모드로의 회귀다.
공백은
무언가를 채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자리 잡을 여백이다.
5. 불안 이후에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기준이다.
이 시기에 필요한 건
의욕도, 계획도 아니다.
속도를 줄이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단계다.
- 이제 나는 무엇에 반응하며 살고 싶은가
- 불안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움직일 것인가
- 꼭 해야 해서가 아니라, 선택해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공백은
답이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질문이 자리 잡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결 론 - 공백은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통로다.
불안이 사라진 뒤의 공백은
가장 오해받는 시기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무기력,
정체,
문제의 신호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공백은
불안이라는 추진력이 사라진 뒤,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중간 지점이다.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잘못된 게 아니다.
당신의 뇌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되는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불안은 떠났고,
아직 새로운 기준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있는 이 공백은
멈춤이 아니라,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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