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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과학/A. 자아와 의식(self-consciousness)

생각의 과학 32편 - 기억은 복제될 수 있는가, 아니면 유일한 흔적인가? (A) : 자아와 의식의 확장 - 2

by assetupproject 2025. 11. 12.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매 순간 다시 써지는 존재의 서사다.
복제의 기술 시대에, 인간의 기억은자아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기억의 철학은 곧 존재의 철학이다.

기억의 생성, 의식의 시작

 

1. 복제 가능한 의식, 그러나 복제 불가능한 기억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서사, ‘나’라는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내적 시공간의 흔적이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나를 형성하고, 그 누적된 기억의 결이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의 모든 기억을 완벽히 복제할 수 있다면,
그 복제체는 원본과 같은 ‘나’ 일 수 있을까?

 

21세기의 뇌과학은 이제 이 질문을 더 이상 철학자들의 영역에만 남겨두지 않는다.
MIT의 신경생물학자 스스무 토네가와(Susumu Tonegawa) 교수 연구팀은

쥐의 해마(Hippocampus)에 특정 기억을 인코딩(Encoding) 하고,

그 신경 패턴을 다른 개체의 뇌에 이식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두 번째 쥐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공포를 느꼈다.
다시 말해, 기억이 물리적으로 복제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그 기억을 느끼는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기억이 옮겨졌다면,
그 감정을 느끼는 ‘나’ 역시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2. 기억의 본질 - 정보인가, 경험인가?

 

신경학적으로 기억은 시냅스 연결의 강화, 즉 뉴런 간 통신 패턴의 변화다.
뇌는 경험을 전기화학적 코드로 변환해 저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그 안에는 감정, 맥락, 시간의 흐름, 의미의 결이 함께 녹아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누가, 언제, 어떤 감정으로 경험했느냐에 따라
그 기억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진다.

 

따라서 기억은 정보로 복제될 수 있지만, 경험으로는 복제될 수 없다.
기억의 진짜 본질은
그 순간을 살아낸 의식의 질감에 있다.

 

,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체험의 잔향이다.
그래서 기억의 복제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 기억을 느낄 자는 결코 복제될 수 없다.

 

3. 신경의 지도 - 해마에서 자아로

 

기억의 중심에는 해마(Hippocampus)가 있다.
해마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며,
공간적·시간적 좌표를 부여해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기억은 해마 혼자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은 편도체(Amygdala),
의미적 판단은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감각적 인상은 후두엽과 두정엽이 담당한다.

 

, 기억은 뇌 전체의 합주.
하나의 기억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뇌 곳곳의 신경 회로가 특정한 리듬으로 재현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장면을 새롭게 다시 그린다.
기억은 저장된 파일이 아니라, 재생되는 시나리오.

 

4. 기억의 불안정성 - 매번 다시 쓰이는 과거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
기억의 왜곡(Distortion of Memory)을 연구하며
기억은 저장된 과거가 아니라 재구성된 현재임을 증명했다.

 

그녀는 실험 참가자에게
차가 부딪쳤습니까?” 혹은차가 부서졌습니까?”
단지 질문의 어휘만 바꿔 물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은 서로 다른 충돌 장면을기억했다.

 

, 기억은 현재의 해석에 따라 다시 쓰인다.
우리의 뇌는 과거를 단순히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서와 신념으로 그것을 재조립한다.

 

기억은 뇌의 기록이 아니라 창작 행위.
그렇기에 과거는 완전히 고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 그 기억은 이미 새롭게 쓰인다.

기억의 재조합, 정체성의 흔들림

 

5. 복제된 기억 - ‘의 끝인가, 혹은 확장인가?

 

오늘날 기술은 뇌 신호를 실시간으로 해석하고,
기억을 디지털화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뉴럴링크(Neuralink), 브레인게이트(BrainGate) 같은 기업들은
전극을 통해 인간의 생각, 감각, 심지어기억 흔적을 데이터로 변환한다.
머지않아 우리의 뇌가 직접 컴퓨터에 연결되는 시대가 열린다.

 

그때, 만약 나의 모든 기억이 복제되어
AI
가 그것을 학습하고 재생한다면 -
그는 ‘나’ 일까, 혹은나의 모사일까?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은 이렇게 말했다.

자아의 동일성은 환상이다중요한 것은 물질적 연속이 아니라, 정보적 연속이다.”

 

그렇다면 복제된 기억이
동일한 의식적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 존재는 또 다른 ‘나’ 일 수밖에 없다.

 

기억의 복제는 정체성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무한히 분기시킨다.
기억이 많아질수록, 자아는 더 다중적이 된다.

 

6. 망각의 역할 - 존재를 보호하는 잊음의 기술

 

망각은 단순한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방어 기제이자, 존재의 재정비 시스템이다.
기억이 자아를 쌓는 과정이라면, 망각은 그 자아가 붕괴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내면의 호흡이다.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망각은 뇌의 생존 메커니즘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나쁜 기억을 지우는 기능이 아니라,
뇌가 과도한 정보와 감정의 부담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작동 원리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경험을 완벽히 기억했다면,
현재의 인식은 과거의 잔상에 잠식되어
새로운 해석이나 선택이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망각은 과거의 무게를 덜어내고
‘지금’을 살아갈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것은 자아가 과거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 기술이다.

 

기억이 정체성을 구성한다면,
망각은 정체성을 갱신하는 능력이다.
완전한 기억은 자아를 고정시키지만,
적절한 망각은 자아를 흐르게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과거의 상처나 실수를
의식의 흐름 속에 흡수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신경학적으로도 망각은 선택적이다.
뇌는 매 순간 방대한 감각 정보를 걸러내며,
의미 있는 자극만을 선택적으로 남긴다.
이 과정은 ‘소거(Decay)’가 아니라 ‘정화(Refinement)’다.
필요 없는 기억이 사라질 때,
뇌는 더 정교한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

 

결국 존재는 기억과 망각의 진자 운동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기억은 자아를 고정시키고, 망각은 그 고정된 자아를 다시 유연하게 푼다.
완전한 기억은 자아의 정지이며, 적절한 망각은 자아의 재생이다.

 

망각은 잃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적 ‘비움’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잊어가며 살아가는 이유는,
그 잊음 속에서만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7. 의식의 시점 - 기억이지금을 만든다.

 

의식은 단순히 과거를 불러오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데이터 조각들을 현재의 맥락 안에서 재조합하는 생성적 엔진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순간은
사실상 과거의 기억들이 실시간으로 재해석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뇌는 과거의 신경 패턴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 흔적들을 현재의 감정, 환경, 기대와 결합해
‘지금의 경험’이라는 새로운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이때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재창조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그 기억은 미세하게 변형되고,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진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의식은 과거를 다시 쓰며,
그 쓰기 행위 자체가 곧 ‘현재의 나’를 만든다.

 

즉,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다시 쓰며 현재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뇌는 정적인 저장 장치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계속 재편집하는 살아 있는 시나리오 편집자다.

 

결국 우리는 “기억이 현재를 창조한다”는 역설 속에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조차 완전한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기대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순간적 계산 결과다.
그렇기에 의식은 과거로부터 비롯되지만,
항상 새로운 ‘지금’을 향해 확장한다.

 

의식은 멈추지 않는 알고리즘이다 -
자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지금을 산출해 내는 살아 있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기억의 재탄생, 의식의 순환

 

결 론 - 기억은 복제될 수 없다. 그러나 계속 다시 쓰일 수 있다.

 

기억은 복제 가능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서사적 생명체다.

 

복제는 기억의 구조를 옮길 수 있지만,
그 안에 깃든 정서의 진동, 시간의 질감, 경험의 온도는 결코 동일하게 재현되지 않는다.
기억의 핵심은 ‘데이터’가 아니라 ‘경험된 의미’이기 때문이다.

 

뇌 속에서 기억은 언제나 움직이고, 변한다.
과거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그 기억은 현재의 감정과 섞이며 다시 쓰인다.
그 과정에서 과거는 단순히 반복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현재로 재탄생한다.

 

결국 인간의 정체성이란
‘기억의 보존’이 아니라 ‘기억의 재구성 능력’에 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쓰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복제된 기억은 형태만 남은 껍질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기억’은 매 순간 스스로를 갱신하며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그 의미를 다시 쓰는 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은 복제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그 살아남음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새로 태어난다.

 

# 다음 편 예고 #

생각의 과학 33자아의 해체와 재조립 : 의식은 어디서 다시 태어나는가?
의식이 분해되고, 다시 결합되는 시대.
디지털 뇌와 인간의 마음은 어디서 만나는가?
자아 재조립의 철학과 신경과학을 탐구한다.